안녕하세요. 스타트업 회사에서 디자인 업무를 8개월째 하고 있는 사회초년생 멘티입니다. 저는 패션을 학부 때 전공하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3년 정도 사회 경험을 했는데요. 디자인 툴을 잘 다루고, 생각을 시각화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신입사원이 됐는데, 벌써 28살이라 경력 관리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렇게 걱정하는 이유는 현재 회사와 직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직하고 싶은데, 뚜렷한 방향이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길어서 순서대로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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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지금 쇼핑몰의 웹디자이너에 지나지 않는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서비스디자인과 UX에 정말 관심이 많아 관련 업무를 하고 싶었는데, 현재 업무는 갑자기 터진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메우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직을 생각하며 국내 디자인컨설팅 회사를 알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이와 관련해 조언을 주실 수 있을까요?
2. 저는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하거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엄청난 활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디자인과 기획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디자이너에서 기획자로 커리어 전환을 해야 하나 고민이지만 어디서 조언을 듣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이런 저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3. 저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두 선임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선임은 업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확고합니다. 그래서 당장 돈이 안 되더라도 미래 먹거리, 트렌드,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발전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반면 두 번째 선임은 공허하게 미래만 좇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결할 수 있고 돈이 되는 문제에 집중하는 분입니다. 실무 최전방에서 디자인을 뽑아내는 스타일인 거죠. 이렇게 다른 방향성이 있는데, 저는 둘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멘토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질문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멘토님이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폭넓게 조언해주시면 방황하고 있는 제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멘티님. 진솔하게 질문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멘티님이 어떤 사람인지 그림이 그려지는 솔직한 글이었어요.
그럼 멘티님의 글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답변이 다소 두서없을 수도 있으나 이해 부탁드립니다.
28살의 나이?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28살의 나이에 경력 관리에 실패했다는 멘티님의 표현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 제 이야기를 잠깐 해드릴게요.
저는 원래 교육을 전공했는데요. 26살이 돼서야 꿈을 디자인으로 바꾸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뒤처진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정말 미친 듯이 달렸습니다. 지금 나이가 34살이지만, 그동안 원하던 서비스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기 직전입니다.
그렇게 8년 동안 제 나름대로 목표를 달성하며 왔는데요. 이는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이와 무관하게 멘티님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주변 상황이나 나이에 신경 쓰기 보다는, 내가 달성하고 싶은 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고민하는 것이 좋습니다.
28살이면 정말 앞길이 창창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부딪히면서 실행하셔도 됩니다. 저도 먼 길을 돌아 디자인에 온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일단 이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국내 서비스디자인 취업은 타협이 필요
멘티님께서는 국내 서비스디자인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국내 회사로는 샘파트너스, 싸이픽스, 더 디엔에이, PXD, 바이널 등이 있습니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으면 한국서비스디자인학회 자료를 찾아보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기업구조나 사내문화를 고려했을 때 국내 회사가 서비스디자인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멘티님이 서비스디자인을 목표로 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타협이 필요합니다.
저도 멘티님처럼 서비스디자인에 대한 갈증이 컸는데요. 타협하기 위해 제가 쓰는 방법은 뚜렷한 주관을 일단 가지고 있되,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업무할 때 나만의 전략으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그러면 아이디어나 접근방식, 결과물이 확실히 달라질 수 있어요.
공부의 깊이를 원한다면 대학원을 추천
멘티님께서 UX, 서비스디자인에 열정이 많으시다면, 대학원에 진학하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사실 사설학원 같은 곳에서 배울 수도 있지만, 깊이가 부족하죠. 저도 학원에서 배워본 적이 있는데 항상 아쉬웠습니다.
그랬던 제가 직접 대학원에서 서비스디자인을 공부해보니, 그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았다는 것을 깨닫고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열심히 연구하시는 교수님들이 있으니까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될 거예요.
전략가 디자이너가 롱런한다
이제 역량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멘티님께서는 본인이 잘하는 분야로 툴을 다루는 능력을 언급하셨는데요. 물론 디자이너에게 툴을 다루고,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은 필요합니다. 비전공자보다는 당연히 시각화하는 능력이 뛰어나야겠죠.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차가 어느 정도 차고나서 관리자가 되면 좀 더 전략적인 시각으로 업무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 없이 툴만 잘 다루는 사람이라면 업계에서 환영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분명 디자이너를 대체할 프로그램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자인 인력의 공급도 많아져서 이미 업무 단가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또한, 예전보다 학원가서 6개월 수업만 듣고 곧잘 툴을 다루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결과적으로 과거 디자이너에게는 손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머리를 사용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는 겁니다. 홍익대학교만 해도 학생을 뽑을 때 실기 시험을 보지 않는데, 아마 이런 이유가 있을 거예요. 따라서 멘티님도 장기적으로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단순히 그림만 잘 그리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전략까지 훌륭하게 짜내는 디자이너가 되어야 합니다.
디자인 기획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
글을 읽어봤을 때, 멘티님은 기획과 디자인의 모호한 경계에서 본인의 역할 설정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계신 것 같아요. 단도직입적으로 저는 기획과 디자인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기획과 디자인을 굳이 구분하지 말고 둘 다 잘해야 한다는 거죠.
물론 디자인 하나만 해도 힘든데, 완벽하게 다 잘 할 수는 없죠. 그러나 디자인을 소홀히 하지 않는 선에서 기획 공부도 해야 합니다.
디자인 업무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작업물을 기획 차원에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만 몰두해서 그리게 되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디자인의 디테일에만 목을 맬 가능성이 커져요. 그러니까 브랜드, 마케팅, 광고, 리서치 방법론 등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림보다, 전략이 훨씬 중요한 시대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세계 시장은 시스템을 리드하는 디자인을 외치고 있어요.
올해 카카오에서 기자간담회를 했을 때, AI 기술이 어느 정도 발전해서 세밀하고 다양한 서비스가 쏟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즉, 그림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줄 수 있으니 그걸 기획하는 전략이 더 중요해지는 추세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전략을 짜는 사람, 그 전략대로 서비스를 운영해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항상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게 됩니다.
멘티님도 기획에 관심과 열정이 있으시니까 포기하지 말고, 이를 고려하면서 업무를 하고 계획도 실행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절충의 미학! 전략과 직관을 동시에 잡기
정반대 스타일의 선임들과 일하고 있는 멘티님의 경험은 지금까지 제가 드린 조언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키워드는 바로 절충과 병행입니다. 전략/기획과 디자인을 둘 다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두 선임의 스타일을 절충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선임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지 분석을 먼저 하는 스타일입니다.
다만 이렇게 분석을 통해 인사이트를 도출하면 브랜드 정체성의 컨셉을 잡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되는데, 결과물에만 집착하면 성과를 내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시장이 결정할 문제를 내가 쥐고 있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빨리 테스트해서 시장에 던져봐야 반응을 알 수 있 는거죠.
반면 두 번째 선임은 직관적인 성격으로 바로 작업물을 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분석이 어렵고, 전자는 직관적인 생각이 힘들 것입니다.
물론 디자인 에이전시는 후자의 직관적인 사람을 선호하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빨리빨리 결과물을 내려면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니까 전략을 짜고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 부재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존 관행만 되풀이하면 분명 시장에서 도태될 가능성이 큽니다. 좋은 툴이 많이 나오고 있고, 일반 기업의 내부 디자이너도 자체적으로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되니까 에이전시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단가를 낮춰서라도 일을 받아야 하니 예전에는 1개만 받아도 될 일을 2, 3개씩 받아야 하는 거죠.
따라서 지나치게 직관에만 의존해서 지금 당장의 결과물에 집착하는 것은 정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분석(전략)과 직관(경험)을 병행해야 하는 거예요.
임마누엘 칸트는 “경험 없는 이론은 지적 유희에 불과하며, 이론 없는 경험은 위태롭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따라서 경험이 없으면 시장을 모른 채 붕 뜨게 되고, 이론과 전략이 없으면 그냥 삽질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어요. 병행과 절충의 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이해가 되셨나요?
능동적으로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세요
마지막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서 무엇이든 진로가 명확하게 결정되기 전까지는 지금 회사에 남아계시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기 위해서 노트를 하나 꺼내 본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세요. 내가 잘하는 것, 앞으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좋아하는 일, 꿈꾸는 이미지 등을 하나하나 적어보는 거죠.
이렇게 리스트를 만들고 나서 시간순으로 배열하시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겁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부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까지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전략을 짜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 한꺼번에 하면 과부하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진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세요. 멘티님께서는 패션 전공으로 학위를 받으셨는데, 아무래도 남들보다는 패션에 대해 더 많이 아시겠죠?
그럼 그 부분이 본인의 강점이 될 수 있으니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크게 생각하세요. 기획하기 위해서는 기획 의도에 생각이 그치면 안 됩니다. 탁상공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그 아이디어가 돈으로 연결될 수 있게 구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덧붙이자면, 고민을 늘어놓고만 있으면 절대로 해결이 안 됩니다. 정리한 뒤에 마음을 정하고 시장에 몸을 내던지는 것도 좋아요. 뭐라도 던져야 결과가 나옵니다. 지금처럼 한 발짝 나아가다 보면 어떻게든 꿈에 다가갈 수 있을 거예요.
자기의 길은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특히 디자이너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멘티님이 원하는 디자인을 할 수는 없지만, 언제 그 시기가 올지 아무도 모르니까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생각하세요. 준비하는 자만이 달콤한 과일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그림만 그리는 디자이너가 아닌, 개척 정신을 가지고 인생의 그림을 그리는 디자이너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긴 글 마치겠습니다. 또 의견 나누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다시 질문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