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멘티님. 진로를 결정하는 데 많은 고민이 엿보이네요. 제가 드라마국에 있어 본 적은 없기는 하지만, 같은 PD이고 방송국 생리가 비슷하니 답변을 드려 볼게요. 주신 질문에 나눠서 답변 드리는 것보다는, 전체 맥락 안에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Adi Goldstein
먼저 하나 말씀드릴 것은요. 기획 PD와 제작 PD가 처음부터 역할로 나뉘진 않습니다. 대개는 제작 PD가 소속된 국의 국장에 기획이나 책임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이른바 결재권자인 셈이죠. 그래서 처음부터 기획 PD로 시작하는 경우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요. 편성 PD 직무의 경우, 큰 방송국에서는 따로 뽑기도 합니다.
최소한의 자격을 제외한 스펙은 불필요!
제가 보기에 멘티님의 스펙은 충분합니다. 학벌 때문에 '유리 천장'이라고 쓰셨는데, 구직자들의 발목을 학벌이 잡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제 선배 PD 중에 멘티님 학교 출신도 있고요.
합격자 중에 고학력자가 많다는 건, 학력으로 선별했다기보다 그중에 영어 잘하고, 글 잘 쓰고, 말 잘하는 사람이 더 많았던 거라고 봐야 할 거예요. 학벌 좋은 사람들보다 실력이 좋으면 합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들 스터디를 추천하는 거고요. 서류 통과하면 그 뒤론 스펙 안 봅니다. 오로지 필기, 면접이 있을 뿐이죠.
영어 성적은 최소 지원 자격을 통과해야 하니 미리 준비해 두시는 게 좋습니다. 요새는 토익보다는 스피킹 쪽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성적 수준은 지원 자격만 넘으면 된다고 봅니다. 대개 토스 6급, 오픽 IL~IM 정도를 요구할 거예요.
이외의 스펙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이나 어학연수도 취업을 위해서라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PD의 업무를 생각해보면 더 그렇죠. 학벌이 좋다고 해서, 대학원을 나왔다고 해서, 외국어를 잘한다고 해서 좋은 콘텐츠나 프로그램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rawpixel
PD는 조율자, 모든 일을 혼자 하지는 않아요
프로그램은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섭외해서 PD가 그리는 큰 그림을 채워가도록 하는 거죠. 그 수많은 관계자들의 이해관계와 인간관계를 치밀하게 조율하여 모두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 PD입니다.
거꾸로 멘티님이 PD를 뽑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학벌 좋은 사람보다는 경험 많고 사회성 있는 지원자를 뽑지 않을까요? 외국어도 해외 공문이나 방송 용어 정도를 이해할 수준이면 충분해요. 아무리 PD가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중요한 번역은 전문 번역가가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편집 기술이나 애펙 등도 실무에서 조연출 때 익히게 되니 처음부터 크게 중시하지 않습니다. 또 입봉한 뒤엔 편집 감독이나 종편 감독, CG 팀이 편집을 따로 맡아서 하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멘티님은 이런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으니 크게 유리하지는 않더라도 '이 친구는 좀 일찍 적응할 수 있겠네' 정도의 참고는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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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자체보다 얻은 교훈을 정리하세요
멘티님은 학점도 좋고 경험도 충분한 데다가 웹콘텐츠 쪽을 경험하셨으니 면접 때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방송국이 *MCN 중심의 최신 미디어 생태계 속에서 고민이 많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건 본인의 경험 자체에 의미를 두지 마시고 거기에서 무엇을 깨닫고 배웠는지, 그 교훈 부분을 잘 정리해야 한다는 거예요. 단순히 '웹드라마를 해봤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미래나 시청자의 반응, 전략, 방송 바깥의 경향성 등등에 대해 정리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경험들도 마찬가지예요. PD가 모든 경험을 다 해볼 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를 위한 콘텐츠를 만들어야 해요. 그러니 해석력, 분석력, 통찰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경험의 절대량은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대외 활동이나 봉사 활동을 더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단지 취업을 위한 거라면 그다지 도움은 안 될 거라고 말씀드립니다. 만약 저라면 그 대신에 언론사 스터디를 하고 최신 이슈들에 대해 찬반양론을 파악하고 자신만의 시각을 정리하는 작업을 할 것 같아요.
ⒸStas Knop
본격 드라마 제작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방송 환경 현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말씀 더 드리자면요. 요즘 드라마 제작은 대부분 외주로 넘기기 때문에 방송국 정규직 PD로 입사한다 해서 활발하게 제작에 임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조연출 기간이 가장 긴 걸로 유명한 곳이 드라마거든요. 인고의 세월이 필요할 겁니다.
그렇다고 프로덕션으로 가는 게 유리하냐고 물으신다면, 환경이 열악한 경우가 많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외주라는 것이 방송국 본사가 정해준 비용과 틀 안에서 퀄리티와 수익을 모두 내야 하기 때문에 인건비를 절감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 영향이 직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죠. 그래서 가능하면 본사 공채로 들어가시길 추천드립니다.
다만 앞으로는 경험하셨듯이 드라마가 웹 쪽으로 많이 진출을 할 겁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볼 수 있고 저렴한 콘텐츠도 만들어볼 수 있거든요. 이런 차원에서 방송국에서도 젊은 PD들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고요. 또 공채 PD로 입사해 웹드라마 쪽 업체로 경력 이직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일단 업계로 들어오면 길이 보일 거예요.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유리 천장이나 방송 환경을 걱정하지 마시고 '내 실력으로 다 극복한다!'라는 자세로 임하시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미 갖춘 것이 많으시기 때문에 걱정 말고 꼭 필요한 것 위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PD는 스펙이 아니라 센스와 열정으로 한다는 걸 기억하시고요. 답변이 되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MCN : 멀티 채널 네트워크 또는 다중 채널 네트워크(MCN, Multi-channel network)는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 트위치TV,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기획사를 말한다.